[인천아시안게임 D-30] 역대 남북체육교류 주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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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14-08-20 04:12
입력 2014-08-20 00:00

도쿄올림픽때 첫 교류… 서울올림픽땐 北 불참… 시드니올림픽 공동입장

남북에 스포츠도 자존심 싸움이었다. 한민족으로서 동질성을 찾기 위한 체육교류의 명분 뒤에서 남북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신경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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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 단일팀으로 출전한 현정화(오른쪽) 선수와 북측 리분희 선수.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1991년 4월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 단일팀으로 출전한 현정화(오른쪽) 선수와 북측 리분희 선수.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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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막식에서 남북한 선수단이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함께 입장하고 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막식에서 남북한 선수단이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함께 입장하고 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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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남북한 선수들이 행사 도중 한데 어울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시드니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남북한 선수들이 행사 도중 한데 어울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분단 이후 남북 간 첫 공식 스포츠교류는 1964년 도쿄올림픽대회를 앞두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대한올림픽위원회에 남북단일팀 구성을 권고하면서 시작됐다. 1차 체육회담은 1963년 1월 24일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는데, 남북은 단일팀 국기와 단가 등을 놓고 대립했다. 남측은 단일팀 국기를 ‘태극기’로 하자고 제안하자 북측은 전면은 태극기, 후면은 인공기로 하자는 1안과 한반도 중심에 오륜 표시를 그린 2안을 제시하는 등 시작부터 이견을 보였다. 또 우리 측이 단가로 아리랑을 제안하자 북측은 25초씩 전후반부를 나눠 각자의 애국가를 연주하자는 기이한 ‘절충안’을 내놓기도 했다. 결국 국기는 IOC집행위원회에 일임하고 단가는 아리랑으로 합의했지만 결국 단일팀 구성에 실패하며 이 같은 합의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1979년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일팀 구성을 놓고 진행된 남북체육회담은 서로가 회담장에 나서는 목적 자체가 다름을 확인하며 무산되기도 했다. 우리 측은 첫 회담 때부터 단일팀 구성 합의 시한을 제시하며 압박했지만, 북측은 “공동훈련장소를 평양으로 하고, 선수단 명칭은 ‘고려’로 하자”는 등 절차 문제를 먼저 논의하자고 주장하며 평행선을 달리며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사마란치 당시 IOC 위원장의 중재로 남북은 다시 만났지만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결국 북한은 대회 불참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반면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에서는 단일팀 구성에는 실패했지만, 남북이 서로의 경기에 응원단을 동원해줄 만큼 분위기가 좋았다. 이후 축구와 탁구대회에서 단일팀을 구성한 남북한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도 공동 응원전을 다시 연출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의 남북 공동입장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의 결실이었다. 이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이 대규모 선수단과 응원단을 이끌고 처음으로 남쪽 땅을 밟으며 다시 한번 분단 역사에서 의미 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안석 기자 ccto@seoul.co.kr
2014-08-2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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