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여민관

서동철 기자
수정 2025-12-23 02:03
입력 2025-12-23 00:45
‘청와대 시대’가 다시 열린다. 대통령실이 이삿짐을 꾸리기 시작했고 이재명 대통령도 해가 바뀌기 전에 집무실을 옮긴다고 한다. 대통령은 여민관(與民館)에 집무실을 두고 비서실장, 정책실장,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일하기로 했다. 청와대 본관에도 집무실은 있지만 정상회담과 같은 행사에만 쓰인다는 소식이다.
여민관은 노무현 정부 시절 옛 비서동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정책 실패의 원인을 의사결정 과정의 오류에서 찾았다. 그는 “회의에서 반대가 없으면 불안하다”고 토로한 적도 있었다. 여민관을 대통령의 지시를 따르는 공간이 아니라 토론으로 정책을 조정하고 갈등 요인을 점검하며 그 확산을 차단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여민관이 위민관(爲民館)으로 바뀐 것은 이명박 정부 시절이다. 그는 ‘국민과 토론하는 정부’보다 ‘국민을 위해 성과를 내는 정부’를 지향했다. 정치는 토론이 아니라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한 글자가 달라졌을 뿐이지만 ‘노무현 시대와는 다른 정부’라는 의미가 담겼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실패 원인을 의사결정의 폐쇄성에서 찾고 ‘열린 청와대’를 표방하며 여민관으로 회귀했다.
여민과 위민은 모두 맹자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군주가 백성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반영하는 게 여민(與民)이다. 백성과의 소통이 동락(同樂)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맹자의 위민 사상은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는 표현으로 함축된다. 여민과 위민에는 모두 소통하지 않으면 국민의 뜻과 멀어진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이 대통령은 어떤 대통령보다 적극적으로 국민 및 정부와 대화하고 있다. 청와대에선 소통이 더욱 활발해지기 바란다. 한편으로 대통령에겐 양극화 해소라는, 맹자 시대에는 없던 과제가 주어져 있다. 새로운 여민관에선 ‘국민과의 소통’을 넘어 ‘다른 생각을 가진 국민과의 소통’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2025-12-23 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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