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들롱의 ‘태양은 가득히’ 처럼… “햇살이 눈부셨을 뿐이에요” [강동삼의 벅차오름]
강동삼 기자
수정 2024-08-31 21:24
입력 2024-08-31 00:11
#되돌아갈 수 있다면, 모든 걸 지울 수 있다면, 나 자신부터 지우고 싶다
“햇살이 눈부실 뿐이에요. 그것 빼고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얼마전 향년 88세로 작고한 프랑스가 낳은 세기의 미남 배우 알랭 들롱(1935. 11. 8~2024. 8. 18)의 대표작 ‘태양은 가득히’에서 나오는 명대사다.
톰 리플리로 분한 알랭 들롱,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배우인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눈빛을 가진 남자. 리플리는 영사기를 이용해 자신이 죽인 친구 필립의 서명을 따라하고 필립의 성대모사까지 하며 필립으로 거짓된 인생을 꿈꾼다. 그때 당시 알랭 들롱처럼 멋있는 사인을 만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이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질환으로 ‘허언증’이라고도 불린다.
미국의 소설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지은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The talented Mr. Ripley, 1955년)에서 따온 말로 ‘리플리병’이나 ‘리플리 효과’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실제로 의학계에서 병명으로 사용되는 말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작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는 1999년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리플리’로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맷 데이먼이 분한 톰 리플리가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모든 걸 지울 수 있다면, 나 자신부터 지우고 싶다”는 말을 한 것 처럼. 리플리증후군을 앓고 있지 않더라도 한번쯤 자신을 지우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과거를 떠올렸을 때 늘 우울하고 상처뿐인 인생이었다면 더더욱 지우고 싶어지리라. 다시 태어나고 싶어지리라.
#서귀포 호근동·서호동 마을의 잘 생긴… 그 흔한 무덤조차 없는 고결하고 고독한 오름
‘태양은 가득히’처럼 ‘햇살이 눈부실 뿐’인 날, 아니 태양을 피하고 싶은 날, 서귀포 신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고근산 오름을 올랐다. 서귀포시 서호동 1286-1번지 일대에 위치한 고근산(孤根山)은 높이가 396m로 지표에서 171m, 둘레 4324m의 산으로 깊지 않은 원형분화구가 정상에 있다. 그 분화구를 한바퀴 도는게 사람의 보조개처럼 매력 포인트이기도 하다.
주변에 이렇다할 산이 없어 홀로 우뚝 서 있는 고독한 오름이다. 마치 고독한 알랭 들롱을 깊은 눈동자를 닮았다.
세기의 미남까지는 아니더라도 고근산은 독야청정하니 잘 생겼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알랭 들롱을 추모하며 “그는 스타 그 이상. 프랑스의 기념비적 존재”라고 했듯, 호근동이나 서호동 사람들은 마을의 얼굴처럼 아끼는 이유가 신시가지의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다른 오름을 산책하는 길에 수없이 만나는 무덤이 그 어디에도 없다. 그만큼 고결한 존재다. 오래 전 몰래 묘를 썼다가 온 마을이 들고 일어나 결국 옮겨야 했을 정도였단다.
서귀포 신시가지 건너편 외길 언덕을 약 100여m 올라가면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초행길이라면 초입에 있는 협소한 주차장을 지나 좀더 올라가면 나오는 탁 트인 주차장에 주차하길 권유한다.
고근산 초입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고근산 남동사면 중턱의 “머흔저리”라고 하는 곳은 예전에 국상을 당했을 때 곡배하던 곡배단(哭排壇)이 있다. 남서사면 숲비탈에는 꿩사냥하던 강생이(강아지 제주사투리)가 떨어져 죽었다고 전해지는 강생이궤(수직동굴)이 있다. 고근산의 유래는 범섬이 가까이 보이는 마을이라 해 호근리(虎近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견해쪽에서는 호근산, 마을이름을 원래부터 호근(好近), 호근(好根)으로 보는 쪽에서는 호근산, 근처에 산이 없어 외롭다는데서 고근산(孤根山), 이밖에 고공산(古公山), 고근산(古近山), 고근산(固根山) 등 예로부터 여러가지로 표기돼 왔으나,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고근산(孤根山)으로 정착됐단다. 고독한 산으로.
제주의 신화 속에서는 거신(巨神) 설문대할망이 심심할 때면 한라산 정상부를 베개 삼고, 고근산 굼부리(분화구)에는 궁둥이를 얹어 앞바다 범섬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서 물장구를 쳤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 계단만 854계단… 서귀포 앞바다보다 아름다운 한라산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오름운동기구가 즐비한 체력단련코너 지점에서부터 가파른 나무계단이 시작된다. 그 나무 계단 밑에는 친절하게 숫자가 박혀있다. 예를 들면 탐방객이 올라온 계단수 ‘500’, 정상까지 남은 계단수 ‘354’이라고 쓰여 있어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헤아릴 수 있어 좋다. 총 계단수가 854개인 셈이다. 800계단을 밟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지만 기분은 좋아진다. 눈앞에 계단이 끝나는 지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 왼쪽으로는 고근산 정상 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는 구서귀포 전망대로 가는 길이다. 정상으로 가기 전, 1차 전망대에서 서귀포 신시가지와 멀리 군산오름과 산방산 머리가 걸려 있는 풍경을 멍하니 앉아 감상한다. 대륜해안경승지, 윗세오름, 하논, 외돌개, 제주월드컵경기장, 범섬, 각시바위, 속골, 최영장군의 범섬승리, 고근산, 돔베낭골, 연동연대 등 대륜명소 12경을 소개하는 안내판도 눈에 띈다.
정상 전망대는 1차 전망대와 달리 남쪽으로 서귀포 앞바다의 전경이 펼쳐진다. 38회차에 소개했던 솔오름 정상에서 보는 전경만큼 코발트빛 바다가 펼쳐지고 서귀포 일대가 또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전망대 북쪽으로는 한라산이 마치 물감을 풀어놓은 듯 하얀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백록담만 가렸던 구름은 점점 북쪽으로 향하더니 이내 산 봉우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귀포 앞바다의 풍광보다 한라산의 절경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오름이었다. 정상 분화구 곳곳에는 망원경이 설치돼 있어 렌즈를 통해 거대한 정상을 눈앞에 있는 것 처럼 목도할 수 있다. 이 곳은 올레길 7-1코스이기도 해 스탬프를 찍는 파란 간세가 반갑게 인사한다. 왕복 1시간 30분 정도 소요돼 무더위를 피하고 싶은 시민들의 쉼터로 제격인 듯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 말라르메 시인의 ‘환영’처럼… ‘햇빛을 가득 이고 저녁 속으로 너는 웃으며 내게 나타났다’숲을 빠져나올 때쯤 불현듯, 우리에겐 ‘목신의 오후’ 전원시로 알려진 스테판 말라르메(1842~1898)의 ‘환영’이란 시가 떠올랐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중 2때의 어떤 환영에 사로 잡혔다.
중학교 2학년때 국어선생님은 아주 생소한 19세기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를 시골 촌뜨기들 앞에서 꺼내 들었다. 마치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처녀시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그때 시가 가슴 아픈 내 마음 한켠을 훅 파고 들면서 나의 심장을 때렸다. 선생님에 대한 경외스러움과 존경스러움까지 겹치면서 도파민인지, 아드레날린인지 마구 치솟아 가슴이 쿵쾅쿵쾅 거렸다. 그날 이후, 외국시인들의 시가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아마 고교 졸업할 때쯤 프랑스 낭만파 시인들에게 대해 더 알고 싶어 랭보, 휘트먼, 워즈워드, 예이츠, 프로스트, 보들레르… 등등의 시인들의 명시들이 나온 ‘세계서정시 100선’을 끼고 살았다. 아마도 사춘기때 나를 위로해주던 시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 시집을 난 성경책처럼 지금도 갖고 있다. 그리고 ‘환영’이란 시를 읊조린다.
‘---너의 첫 입맞춤으로 축복받은 날이었지./가슴이 찢어지도록 사랑에 빠진 나의 몽상은/슬픔의 향기에 얌전히 취했노라/꿈을 꺾으면 꺾은 가슴 속에/회한도 환멸도 없이 남는/슬픔의 향기에/정말 교묘하게 취했노라/오래된 포도만을 바라보며/방황하노라면,/머리카락에 햇빛 가득 이고, /거리에,/저녁 속으로 너는 웃으며 내게 나타났다.’
우리가 아는 먹는 포도가 아닌 ‘포도(鋪道)’라는 새 단어를 어린 소년은 알게 돼 뿌듯했고, 누군가를 반갑게 맞이하는 환영(歡迎)이 아닌 ‘환영’(幻影)이라는 단어를 알게 됐을 때의 설렘…. 그때 알았다. 시(詩)란 ‘가슴 시린 단어를 골라써야 하는 거구나’ 라는 것을. 지금 생각하면 약간 ‘유치한 착각이자 상념’이었다.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의 한 장면처럼. ‘태양이 부러워할 만큼 내 허영이 휩쓰는 늪’에 빠져있던 것이리라.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여름을 식혀줄 시원한 폭포수가 매력적인 ‘엉또폭포’
고근산오름에서 차로 5분여 서쪽으로 가면 비가 올때만 만나는 폭포수가 있다. 엉또폭포다. ‘태양이 가득’한 한여름 시원한 빗줄기를 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꿈꾸며 찾아갔다. 혹시라도 비가 오면 갈 곳 없다고 박물관이나 카페에만 있지 마시길. 전날 빗줄기가 거세게 내렸다면, 어김없이 엉또 절벽에는 정방폭포보다 거센 폭포수가 쏟아진다. 우렁찬 폭포소리는 당신의 눈과 귀를 시원하게 해줄 것이다.
엉또는 엉의 입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엉은 작은 바위 그늘집보다 작은 굴을 의미하며 또는 입구를 표현하는 제주어이다. 엉또폭포는 보일 듯 말 듯 숲속에 숨어 지내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때면 위용스러운 자태를 드러내는 폭포로 높이 50m에 이른다. 신비스런 기암절벽과 주변 과수원이 이상스럽게도 조화를 이루며 제주다움을 물씬 풍긴다.
엉또폭포를 보고 내려오는 길목에 한나라(몽골) 금은보화 숨겨둔 곳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얘기지만, 그 표지판에는 ‘여몽연합군이 삼별초의 난을 평정(1273년) 한 뒤, 몽골은 탐라총관부를 두어 제주도를 직할 통치한다. 오름과 초지로 이어진 지형은 몽골초원과 비슷하면서도 비교할 수 없이 따뜻한 남쪽나라 탐라는 그들의 하와이였다. 대규모 목마장을 경영했던 목호(몽골인)들을 통해 제주도의 가치를 잘 알게 된 원나라 순제 (기황후의 남편)가 1367년 피난궁을 짓기로 결정해 책임자 고대비를 앞세워 목수들과 자재 그리고 황금과 비단, 황실 창고의 귀중품들을 제주도로 이송, 법화사와 강정동 대궐터 가까운 곳으로 숨겨두었다는 전해진다. 금은포화 은닉처는 엉또폭포 주변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했더라도 법화사와 대궐터에서 반경 4㎞ 이내 거리이고 중요 지형지물인 큰 폭포가 있었으니, 우선순위 1번으로 선정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명나라가 회수하려 해도 응하는 척 시늉만 하면서 훗날을 도모해 보물지도에 표시하기 좋고 나중에 찾기도 쉬운 이곳에 보관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적혀 있다.
돌아오는 길에 산장같은 무인카페를 들러도 좋다. 달달한 다방커피가 생각난다. 7080년대 레트로풍이 물씬 묻어나는 곳에 앉아 있자니 중2때 국어선생님에게 묻고 싶어졌다.
“선생님, 그때 왜, 하필 말라르메 시인의 시를 낭송해주셨나요.”
글 사진 제주 강동삼 기자
“햇살이 눈부실 뿐이에요. 그것 빼고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얼마전 향년 88세로 작고한 프랑스가 낳은 세기의 미남 배우 알랭 들롱(1935. 11. 8~2024. 8. 18)의 대표작 ‘태양은 가득히’에서 나오는 명대사다.
톰 리플리로 분한 알랭 들롱,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배우인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눈빛을 가진 남자. 리플리는 영사기를 이용해 자신이 죽인 친구 필립의 서명을 따라하고 필립의 성대모사까지 하며 필립으로 거짓된 인생을 꿈꾼다. 그때 당시 알랭 들롱처럼 멋있는 사인을 만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이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질환으로 ‘허언증’이라고도 불린다.
미국의 소설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지은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The talented Mr. Ripley, 1955년)에서 따온 말로 ‘리플리병’이나 ‘리플리 효과’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실제로 의학계에서 병명으로 사용되는 말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작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는 1999년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리플리’로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맷 데이먼이 분한 톰 리플리가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모든 걸 지울 수 있다면, 나 자신부터 지우고 싶다”는 말을 한 것 처럼. 리플리증후군을 앓고 있지 않더라도 한번쯤 자신을 지우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과거를 떠올렸을 때 늘 우울하고 상처뿐인 인생이었다면 더더욱 지우고 싶어지리라. 다시 태어나고 싶어지리라.
#서귀포 호근동·서호동 마을의 잘 생긴… 그 흔한 무덤조차 없는 고결하고 고독한 오름
주변에 이렇다할 산이 없어 홀로 우뚝 서 있는 고독한 오름이다. 마치 고독한 알랭 들롱을 깊은 눈동자를 닮았다.
세기의 미남까지는 아니더라도 고근산은 독야청정하니 잘 생겼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알랭 들롱을 추모하며 “그는 스타 그 이상. 프랑스의 기념비적 존재”라고 했듯, 호근동이나 서호동 사람들은 마을의 얼굴처럼 아끼는 이유가 신시가지의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다른 오름을 산책하는 길에 수없이 만나는 무덤이 그 어디에도 없다. 그만큼 고결한 존재다. 오래 전 몰래 묘를 썼다가 온 마을이 들고 일어나 결국 옮겨야 했을 정도였단다.
서귀포 신시가지 건너편 외길 언덕을 약 100여m 올라가면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초행길이라면 초입에 있는 협소한 주차장을 지나 좀더 올라가면 나오는 탁 트인 주차장에 주차하길 권유한다.
고근산 초입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고근산 남동사면 중턱의 “머흔저리”라고 하는 곳은 예전에 국상을 당했을 때 곡배하던 곡배단(哭排壇)이 있다. 남서사면 숲비탈에는 꿩사냥하던 강생이(강아지 제주사투리)가 떨어져 죽었다고 전해지는 강생이궤(수직동굴)이 있다. 고근산의 유래는 범섬이 가까이 보이는 마을이라 해 호근리(虎近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견해쪽에서는 호근산, 마을이름을 원래부터 호근(好近), 호근(好根)으로 보는 쪽에서는 호근산, 근처에 산이 없어 외롭다는데서 고근산(孤根山), 이밖에 고공산(古公山), 고근산(古近山), 고근산(固根山) 등 예로부터 여러가지로 표기돼 왔으나,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고근산(孤根山)으로 정착됐단다. 고독한 산으로.
제주의 신화 속에서는 거신(巨神) 설문대할망이 심심할 때면 한라산 정상부를 베개 삼고, 고근산 굼부리(분화구)에는 궁둥이를 얹어 앞바다 범섬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서 물장구를 쳤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 계단만 854계단… 서귀포 앞바다보다 아름다운 한라산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오름운동기구가 즐비한 체력단련코너 지점에서부터 가파른 나무계단이 시작된다. 그 나무 계단 밑에는 친절하게 숫자가 박혀있다. 예를 들면 탐방객이 올라온 계단수 ‘500’, 정상까지 남은 계단수 ‘354’이라고 쓰여 있어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헤아릴 수 있어 좋다. 총 계단수가 854개인 셈이다. 800계단을 밟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지만 기분은 좋아진다. 눈앞에 계단이 끝나는 지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 왼쪽으로는 고근산 정상 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는 구서귀포 전망대로 가는 길이다. 정상으로 가기 전, 1차 전망대에서 서귀포 신시가지와 멀리 군산오름과 산방산 머리가 걸려 있는 풍경을 멍하니 앉아 감상한다. 대륜해안경승지, 윗세오름, 하논, 외돌개, 제주월드컵경기장, 범섬, 각시바위, 속골, 최영장군의 범섬승리, 고근산, 돔베낭골, 연동연대 등 대륜명소 12경을 소개하는 안내판도 눈에 띈다.
정상 전망대는 1차 전망대와 달리 남쪽으로 서귀포 앞바다의 전경이 펼쳐진다. 38회차에 소개했던 솔오름 정상에서 보는 전경만큼 코발트빛 바다가 펼쳐지고 서귀포 일대가 또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전망대 북쪽으로는 한라산이 마치 물감을 풀어놓은 듯 하얀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백록담만 가렸던 구름은 점점 북쪽으로 향하더니 이내 산 봉우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귀포 앞바다의 풍광보다 한라산의 절경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오름이었다. 정상 분화구 곳곳에는 망원경이 설치돼 있어 렌즈를 통해 거대한 정상을 눈앞에 있는 것 처럼 목도할 수 있다. 이 곳은 올레길 7-1코스이기도 해 스탬프를 찍는 파란 간세가 반갑게 인사한다. 왕복 1시간 30분 정도 소요돼 무더위를 피하고 싶은 시민들의 쉼터로 제격인 듯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 말라르메 시인의 ‘환영’처럼… ‘햇빛을 가득 이고 저녁 속으로 너는 웃으며 내게 나타났다’숲을 빠져나올 때쯤 불현듯, 우리에겐 ‘목신의 오후’ 전원시로 알려진 스테판 말라르메(1842~1898)의 ‘환영’이란 시가 떠올랐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중 2때의 어떤 환영에 사로 잡혔다.
중학교 2학년때 국어선생님은 아주 생소한 19세기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를 시골 촌뜨기들 앞에서 꺼내 들었다. 마치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처녀시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그때 시가 가슴 아픈 내 마음 한켠을 훅 파고 들면서 나의 심장을 때렸다. 선생님에 대한 경외스러움과 존경스러움까지 겹치면서 도파민인지, 아드레날린인지 마구 치솟아 가슴이 쿵쾅쿵쾅 거렸다. 그날 이후, 외국시인들의 시가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아마 고교 졸업할 때쯤 프랑스 낭만파 시인들에게 대해 더 알고 싶어 랭보, 휘트먼, 워즈워드, 예이츠, 프로스트, 보들레르… 등등의 시인들의 명시들이 나온 ‘세계서정시 100선’을 끼고 살았다. 아마도 사춘기때 나를 위로해주던 시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 시집을 난 성경책처럼 지금도 갖고 있다. 그리고 ‘환영’이란 시를 읊조린다.
‘---너의 첫 입맞춤으로 축복받은 날이었지./가슴이 찢어지도록 사랑에 빠진 나의 몽상은/슬픔의 향기에 얌전히 취했노라/꿈을 꺾으면 꺾은 가슴 속에/회한도 환멸도 없이 남는/슬픔의 향기에/정말 교묘하게 취했노라/오래된 포도만을 바라보며/방황하노라면,/머리카락에 햇빛 가득 이고, /거리에,/저녁 속으로 너는 웃으며 내게 나타났다.’
우리가 아는 먹는 포도가 아닌 ‘포도(鋪道)’라는 새 단어를 어린 소년은 알게 돼 뿌듯했고, 누군가를 반갑게 맞이하는 환영(歡迎)이 아닌 ‘환영’(幻影)이라는 단어를 알게 됐을 때의 설렘…. 그때 알았다. 시(詩)란 ‘가슴 시린 단어를 골라써야 하는 거구나’ 라는 것을. 지금 생각하면 약간 ‘유치한 착각이자 상념’이었다.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의 한 장면처럼. ‘태양이 부러워할 만큼 내 허영이 휩쓰는 늪’에 빠져있던 것이리라.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여름을 식혀줄 시원한 폭포수가 매력적인 ‘엉또폭포’
고근산오름에서 차로 5분여 서쪽으로 가면 비가 올때만 만나는 폭포수가 있다. 엉또폭포다. ‘태양이 가득’한 한여름 시원한 빗줄기를 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꿈꾸며 찾아갔다. 혹시라도 비가 오면 갈 곳 없다고 박물관이나 카페에만 있지 마시길. 전날 빗줄기가 거세게 내렸다면, 어김없이 엉또 절벽에는 정방폭포보다 거센 폭포수가 쏟아진다. 우렁찬 폭포소리는 당신의 눈과 귀를 시원하게 해줄 것이다.
엉또는 엉의 입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엉은 작은 바위 그늘집보다 작은 굴을 의미하며 또는 입구를 표현하는 제주어이다. 엉또폭포는 보일 듯 말 듯 숲속에 숨어 지내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때면 위용스러운 자태를 드러내는 폭포로 높이 50m에 이른다. 신비스런 기암절벽과 주변 과수원이 이상스럽게도 조화를 이루며 제주다움을 물씬 풍긴다.
엉또폭포를 보고 내려오는 길목에 한나라(몽골) 금은보화 숨겨둔 곳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얘기지만, 그 표지판에는 ‘여몽연합군이 삼별초의 난을 평정(1273년) 한 뒤, 몽골은 탐라총관부를 두어 제주도를 직할 통치한다. 오름과 초지로 이어진 지형은 몽골초원과 비슷하면서도 비교할 수 없이 따뜻한 남쪽나라 탐라는 그들의 하와이였다. 대규모 목마장을 경영했던 목호(몽골인)들을 통해 제주도의 가치를 잘 알게 된 원나라 순제 (기황후의 남편)가 1367년 피난궁을 짓기로 결정해 책임자 고대비를 앞세워 목수들과 자재 그리고 황금과 비단, 황실 창고의 귀중품들을 제주도로 이송, 법화사와 강정동 대궐터 가까운 곳으로 숨겨두었다는 전해진다. 금은포화 은닉처는 엉또폭포 주변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했더라도 법화사와 대궐터에서 반경 4㎞ 이내 거리이고 중요 지형지물인 큰 폭포가 있었으니, 우선순위 1번으로 선정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명나라가 회수하려 해도 응하는 척 시늉만 하면서 훗날을 도모해 보물지도에 표시하기 좋고 나중에 찾기도 쉬운 이곳에 보관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적혀 있다.
돌아오는 길에 산장같은 무인카페를 들러도 좋다. 달달한 다방커피가 생각난다. 7080년대 레트로풍이 물씬 묻어나는 곳에 앉아 있자니 중2때 국어선생님에게 묻고 싶어졌다.
“선생님, 그때 왜, 하필 말라르메 시인의 시를 낭송해주셨나요.”
글 사진 제주 강동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