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 장벽 넘어… 한국식 유머가 뉴욕을 뒤집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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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경 기자
최여경 기자
수정 2026-09-21 00:35
입력 2026-09-20 19:30

현지 관객 홀린 연극 ‘벚꽃동산’

한국 재벌가로 각색한 체호프 희곡
전도연·박해수 등 스타 배우 출연
뉴욕 맞춤 농담에 폭소 만발·호평
기립박수 이어져… 11회 전석 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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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파크 에비뉴 아모리 웨이드 톰슨 드릴홀에서 16일(현지시간) 개막한 연극 ‘벚꽃동산’은 안톤 체호프 희곡을 사이먼 스톤 연출이 한국 현대로 배경을 옮겨 과거와 현재, 희망과 절망, 전통과 혁신 사이에 놓인 위태로운 재벌가의 현실을 그렸다. 무대 위 현대적인 유리집은 옆면에 제각각 높이의 계단이 설치돼 상승과 몰락, 불안을 표현한다. 전도연(사진)은 천진하고 무모한 재벌 3세 송도영으로, 박해수는 자수성가해 기업을 인수하는 황두식으로 분해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연기를 펼친다. ⓒStephanie Berger·파크 애비뉴 아모리 제공
미국 뉴욕 파크 에비뉴 아모리 웨이드 톰슨 드릴홀에서 16일(현지시간) 개막한 연극 ‘벚꽃동산’은 안톤 체호프 희곡을 사이먼 스톤 연출이 한국 현대로 배경을 옮겨 과거와 현재, 희망과 절망, 전통과 혁신 사이에 놓인 위태로운 재벌가의 현실을 그렸다. 무대 위 현대적인 유리집은 옆면에 제각각 높이의 계단이 설치돼 상승과 몰락, 불안을 표현한다. 전도연(사진)은 천진하고 무모한 재벌 3세 송도영으로, 박해수는 자수성가해 기업을 인수하는 황두식으로 분해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연기를 펼친다.
ⓒStephanie Berger·파크 애비뉴 아모리 제공


미국 뉴욕 파크 애비뉴 아모리의 웨이드 톰슨 드릴홀에 한국어 대사가 울려 퍼졌다. 19세기 무기고로 지어진 이 거대한 홀에 간이 객석 1200석이 들어섰고, 뉴욕을 겨냥한 농담이 나올 때마다 객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오페라가 아닌 이상 자막을 읽을 일이 거의 없던 영미권 관객들은 한국 연극에서 자막을 따라 읽으면서도 대사의 속도감과 유머를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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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스톤
사이먼 스톤


사이먼 스톤(42) 연출이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마지막 희곡을 오늘의 서울로 옮긴 ‘벚꽃동산’은 지난 16일(현지시간) 북미 초연에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스톤은 1904년 러시아의 몰락한 귀족 가문을 오늘의 한국 재벌가로 옮겼다. 영지를 잃는 여지주 라넵스카야는 가족 기업이 기우는 줄도 모르는 3세 송도영(전도연 분), 농노의 아들로 태어나 그 땅을 사들이는 신흥 자본가 로파힌은 운전기사의 아들로 자라 자수성가한 사업가 황두식(박해수)이 됐다. 현실 감각 없는 오빠 가예프는 골프 스윙과 LP턴테이블에만 마음을 쓰는 송재영(손상규), 수양딸 바랴는 회사 부사장으로 일하며 홀로 위기를 붙들고 있는 강현숙(최희서) 등으로 바뀌었다.

재벌가의 찬란한 과거인 벚꽃동산은 아버지가 딸에게 생일 선물로 지어준 유리집이 무대 위에 대신 앉았다. 건축 디자이너 사울 킴(32)이 디자인한 현대적인 유리집은 서울과 부산, 홍콩, 싱가포르, 호주 애들레이드에서는 하얀 배경의 무대 안에 있었지만 이번엔 달라졌다. 병기창 내부를 살린 검은 공간 안에 섬처럼 놓였다. 장소 안에 원래 있던 커다란 티파니 시계는 때때로 조명을 받으며 노을 장면에서 해가 됐다. 디스위크인뉴욕의 마크 리프킨은 19일자 비평에서 이 시계를 “송씨 일가의 시간이 다해간다는 의미”로 읽기도 했다.

원작에서 라넵스카야가 살다 온 파리를 뉴욕으로 바꾸어 뉴욕 관객들과 상당한 접점을 이뤘다. 아들을 잃고 10년을 뉴욕에서 보낸 도영이 “거기서는 섹스에 대해서 아주 솔직하게 얘기해, 거의 국민 스포츠라고나 할까”라고 말할 때 첫 폭소가 터졌다. “알코올 중독자로 살기 딱 좋은 도시”, “맨해튼에 널려있는, 입으로만 스타트업 하는” 같은 말이 나올 때도 웃음이 터졌다.

체호프의 희곡을 잘 알고 있다는 엘리나는 “가장 대중적인 희곡을 한국 현실로 각색해 이해하는 데 어렵지 않았다”면서 “자막으로 농담을 접해도 배우 연기와 상황이 접목되면서 매우 유쾌했다”고 말했다.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카린은 “뉴욕 조크가 정말 정확하다”고 했고, 클로이는 “공간을 쓰는 방식이 매우 역동적이라 흥미로웠다”고 평가했다.

현지 비평도 웃음을 먼저 이야기했다. 뉴욕스테이지리뷰의 멜리사 로즈 버나도는 18일자에 “이만큼 웃긴 ‘벚꽃동산’이 있었느냐”며 “웃긴 건 어떤 언어로도 웃기다”고 썼다. 씨어터마니아의 데이비드 고든은 “전도연은 몇 마디로 무모함과 신중함을 오가고, 손상규는 껴안아 주고 싶은 인물이다. 박해수는 초반의 다정함을 빠르게 벗고 사나운 권위를 드러낸다”며 연기를 호평했다. 자막에 대해서는 “누가 말하는지 표시가 없고 너무 빨리 지나가 초반 시선을 빼앗는다”(리프킨), “접근하기 쉬웠다”(버나도)고 평가가 엇갈리기도 한다.

이 작품이 가닿은 이유를 스톤은 17일 아티스트 토크에서 설명했다. 그는 “사람들은 한국을 일본과 비교하는 실수를 자주 하지만 기질을 보면 러시아와 훨씬 가깝다”면서 “러시아인들이 역사 내내 미래와 정체성을 두고 불안해했듯 한국인들도 우리는 누구인지 끊임없이 묻는다”고 진단했다. 서구에서라면 심드렁하게 들릴 혁명이라는 말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몰락한 귀족을 재벌 3세로 옮긴 치환이 관념적 유희에 그치지 않은 이유다. 배우에 대해서도 스톤은 “비극의 계곡에 떨어졌다가 다시 웃음으로 돌아온다”면서 배우들이 희극과 비극 사이를 힘들이지 않고 오간다고 언급했다.



공연 마지막 암전이 풀리자 객석 곳곳에서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전도연은 첫 공연 후 “기립박수를 받는 순간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 났다”고 소감을 전했다. LG아트센터가 제작해 2024년 6월 서울에서 초연한 ‘벚꽃동산’은 뉴욕 공연으로 2년 3개월의 여정을 끝낸다. 26일까지 11회 예정된 뉴욕 공연은 전석이 매진됐다.

뉴욕 최여경 선임기자
세줄 요약
  • 뉴욕 초연서 한국어 연극, 자막 장벽 넘어 호응
  • 체호프 ‘벚꽃동산’ 한국 재벌가로 각색, 폭소 유발
  • 전도연·박해수 연기 호평, 11회 전석 매진
2026-09-2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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