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위에 삶과 예술을 짓다… 반세기의 시간 담은 ‘바비칸’ [포토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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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 기자
홍윤기 기자
수정 2026-09-23 23:21
입력 2026-09-23 17:22

2차 대전 뒤 재생한 런던 속 ‘콘크리트 도시’… 거친 벽면 사이 흐르는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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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금융 중심가 시티 오브 런던에 자리한 바비칸의 불빛이 밤을 밝히고 있다. 바비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된 지역을 재개발해 조성한 주거·문화 복합단지다. 거친 콘크리트 건축물 사이로 주거 공간과 정원, 호수, 문화시설 등이 어우러져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다.
런던 금융 중심가 시티 오브 런던에 자리한 바비칸의 불빛이 밤을 밝히고 있다. 바비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된 지역을 재개발해 조성한 주거·문화 복합단지다. 거친 콘크리트 건축물 사이로 주거 공간과 정원, 호수, 문화시설 등이 어우러져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다.


지난 8일(현지시간) 찾은 영국 런던 ‘바비칸’은 잿빛 콘크리트와 초록빛 자연이 교차하는 모습이었다. 거대한 기둥 아래로 물이 흘렀고, 물이 고여 만들어진 연못 위론 수련이 떠다녔다. 각 세대 발코니마다 나무와 화분이 자랐다. 연못가와 광장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거친 콘크리트 사이를 자연이 메우고 사람들의 일상이 다채로운 공기를 더하는 곳. 주거단지면서도 미학적 가치와 자연의 역동성, 문화적 활기를 한데 품은 바비칸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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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과 직선 등 다양한 형태의 바비칸 건축물이 겹쳐 보이며 독특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곡선과 직선 등 다양한 형태의 바비칸 건축물이 겹쳐 보이며 독특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뜻밖에도 이 풍경의 시작은 폐허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크리플게이트(현 바비칸 부지) 일대는 사실상 초토화됐다. 전쟁이 끝난 뒤 도시재생 사업을 진행하던 런던시는 이 부지를 단순히 복구만 하는 건 원치 않았다. 약16만 5000제곱미터에 달하는 그곳을 완전히 새로운 주거 패러다임의 시험장으로 삼고자 했다. 단순 거주공간이 아닌, 그 안에만 있어도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도시 속 작은 도시’를 구성하려 한 것이다. 그 뜻을 받들어 건축회사 ‘체임빌런, 파월 앤 본’이 설계의 총대를 멨다. 2000여가구의 주택과 함께 학교, 교회, 도서관 등 생활 인프라 시설을 배치했다. 건물 사이에 정원과 인공호수, 공중 보행로를 만들어 단조롭지 않게 공간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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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에 설치된 조명에 맞은편 건물이 비치고 있다. 곳곳에 세심한 디자인 요소가 녹아 있다.
보도에 설치된 조명에 맞은편 건물이 비치고 있다. 곳곳에 세심한 디자인 요소가 녹아 있다.


특히 대규모 복합문화시설 ‘바비칸센터’는 화룡점정이었다. 1982년 문을 연 바비칸센터엔 1943석 규모의 콘서트홀을 비롯해 두 개의 공연장과 세 개의 영화관이 들어섰다. 그뿐 아니라 미술관과 도서관, 2000종 이상의 열대식물이 자라는 온실까지 갖췄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개관 때부터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고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무대에 올랐다. 우리나라 피아니스트 조성진도 그중 한 명이다. 아파트 단지 안에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상주하는 공연장이 공존한다고 상상해보면, 바비칸이 지닌 주거 이상의 의미와 위상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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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칸 주거동의 테라스에 주민들이 가꾼 나무와 화분이 놓여 있다.
바비칸 주거동의 테라스에 주민들이 가꾼 나무와 화분이 놓여 있다.


놀라운 지점은 이토록 풍성한 도시를 감싼 외피가 투박하기 그지없는 콘크리트라는 사실이다. 콘크리트는 바비칸의 건축 양식 ‘브루탈리즘’을 대표하는 소재다. 브루탈리즘은 단순한 형태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특징으로 한다. 재료의 순수성, 즉 콘크리트 본연의 거친 질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화려한 장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대신 건물 전체를 콘크리트 조각상처럼 만들어 기하학적 예술성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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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으로 설계된 저층 주거동 중앙에서는 공연과 영화 상영 등이 열리며, 주민들은 각 세대 테라스에서도 관람할 수 있다.
원형으로 설계된 저층 주거동 중앙에서는 공연과 영화 상영 등이 열리며, 주민들은 각 세대 테라스에서도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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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칸 센터와 주거동을 잇는 다리의 콘크리트 기둥. 거칠게 드러난 질감은 브루탈리즘 건축의 특징이다.
바비칸 센터와 주거동을 잇는 다리의 콘크리트 기둥. 거칠게 드러난 질감은 브루탈리즘 건축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바비칸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집값과 임대료가 높은 가격에 형성돼 있어 주로 고소득계층 및 경제적 상위층이 입주민의 주를 이룬다고 한다. 바비칸을 처음 설계할 당시로 돌아가보면, 런던시의 의도 역시 이와 맞아떨어진다. 문화, 편의, 자연 등에 대한 수요와 자금 여력이 동시에 있는 이들을 런던 도심으로 유인할 방책이 바로 바비칸이라는 ‘주거 유토피아’ 구축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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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성이 광장 호수 앞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한 남성이 광장 호수 앞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바비칸은 결국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집에 ‘어떤 삶’을 담을 것인가. 건축과 예술을 좋아한다면 런던에서 이 거대한 콘크리트 도시를 한번 걸어보는 건 어떨까. 거친 벽면 사이를 걷다 보면 그곳에 켜켜이 쌓인 반세기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다.

글·사진 런던 홍윤기 기자
세줄 요약
  • 전쟁 폐허 위에 조성한 런던 바비칸 단지
  • 주거·문화·자연을 함께 담은 도시 실험
  • 브루탈리즘 콘크리트와 예술의 공존
2026-09-24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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