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게 술 마시고 작별한 그날…박종철 선배가 죽었다”
신성은 기자
수정 2018-01-12 09:24
입력 2018-01-11 10:27
박 열사 대학 동기·후배의 기억…“순수하고 선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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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14일 경찰의 고문을 받아 숨진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열사. 야유회에 참석한 모습이다.
박종철기념사업회 제공=연합뉴스 -
1987년 1월 14일 경찰의 고문을 받아 숨진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열사(앞줄 왼쪽). 대학교 1학년 MT에서 대학 동기들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이윤정씨 제공=연합뉴스 -
민주화운동관련자 보상및 명예회복추진위는 분과위 회의에서 지난 87년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숨진 고 박종철씨와 이한열씨를 14년만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왼쪽이 박종철씨.
연합뉴스 -
사진은 용산구 남영동 경찰청 인권센터 내 박종철 기념전시실.
서울시 제공 -
397세대의 뇌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저자의 책은 친숙한 기억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민주화 30주년을 맞아 6월 민주항쟁 관련 자료를 선보이는 사진전 ‘1987년을 돌아보다’를 오는 10일부터 8월 27일까지 야외 역사마당에서 연다고 9일 전했다.이번 전시에는 1987년 1월 벌어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나와 직선제 개헌과 독재정권 타도를 외친 6월 민주항쟁, 그해 12월 개헌으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까지 30년 전 모습을 담은 사진 30여 점이 나온다. 사진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시위대와 진압하는 경찰, 서울역 앞, 1987년 구와바라 시세이 작품. 2017.6.9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연합뉴스 -
서울대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부산 남포동 신민당 시위.
박상문 기자 -
1987년 경찰의 고문수사로 사망한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추도식에서 박군의 어머니가 조사를 읽고 있다.
김영중 기자 -
1987 민주항쟁.박종철 고문치사 추모집회. 이기택 강삼재 김수환
박영군 기자 -
1987 민주항쟁. 박종철 고문치사 고문 경찰관 압송.
박영군 기자 -
1987년 경찰의 고문수사로 사망한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추도식이 명동성당에서 열리고 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
박종철 열사 30주기 추모식… 애끊는 父情지난 14일 부산 부산진구 소민아트센터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30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박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왼쪽)씨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다.
부산 연합뉴스 -
서울시는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의 31주기(1월 14일)를 맞아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었던 건물의 출입구 바닥에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역삼각형 형태의 동판을 설치했다고 11일 전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박종철 열사와 ’민주화 운동의 거목’으로 불리는 고(故)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등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끌려와 강도 높은 고문을 당한 곳이다.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
서울시가 고(故) 박종철 열사의 31주기에 맞춰 ’남영동 대공분실 터’ 등 6곳에 인권현장 표지석을 설치 완료했다고 11일 전했다. 사진은 민주인사 등에게 고문수사를 했던 국군보안사 서빙고분실 터에 바닥동판이 설치된 모습.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
민주화운동의 성지 ‘모란공원’박종철 열사 묘역의 모습. 2017.6.9 -
박종철 열사 참배 시민행렬1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시민들이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고 숨진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추모의 공간을 방문해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
서울시가 고(故) 박종철 열사의 31주기에 맞춰 ’남영동 대공분실 터’ 등 6곳에 인권현장 표지석을 설치 완료했다고 11일 전했다. 사진은 10?28 건대항쟁 자리에 설치된 바닥 동판. ’10.28 건대항쟁’은 1986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건국대에서 전개된 민주화 운동이다.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
서울시는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의 31주기(1월 14일)를 맞아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었던 건물의 출입구 바닥에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역삼각형 형태의 동판을 설치했다고 11일 전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박종철 열사와 ’민주화 운동의 거목’으로 불리는 고(故)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등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끌려와 강도 높은 고문을 당한 곳이다.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
서울시가 고(故) 박종철 열사의 31주기에 맞춰 ’남영동 대공분실 터’ 등 6곳에 인권현장 표지석을 설치 완료했다고 11일 전했다. 사진은 ’남영동 대공분실 터(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민주화운동 당시 단일사건 최대인 1천2백88명의 학생이 구속당한 ’10.28 건대항쟁 자리’, 민주인사 등에게 고문수사를 했던 국군보안사 서빙고분실 ’빙고호텔 터’, 일제강점기 여성인권을 탄압한 대표적인 기생조합인 ’한성권번 터’ 미니스커트?장발 단속 등 국가의 통제와 청년들의 자유가 충돌했던 ’명동파출소’, 부실공사와 안전관리 소홀로 49명의 사상자를 낸 ’성수대교’ 표지석.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
박종철 열사 30주기 추모 사진전14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박종철 열사 30주기 추모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1987년 1월 14일 경찰의 고문을 받아 숨진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열사의 대학 1년 후배인 이현주(52·여)씨는 31년이 지난 지금도 박 열사의 마지막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이씨는 11일 연합뉴스와 전화 인터뷰에서 박 열사와 함께했던 마지막 순간을 불과 어제 일처럼 생생히 전했다. 그는 인터뷰 도중 감정이 북받쳐 올라 수시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는 박 열사의 마지막은 ‘유쾌한 선배’의 모습이었다.
이씨는 “1987년 1월 13일 자정에 학과 학생회장이었던 종철이 형이 성적표를 전해준다고 신림동 집 앞에 왔다”며 “늦은 시간이니 집에 가라고 했는데 옆에 있던 내 동생한테 야식이라도 사줘야 한다면서 같이 나오라고 하니 안 나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근처 분식집에서 박 열사와 함께 2∼3시간가량 만두를 먹으며 술을 마셨다고 회상했다.
그는 “얼마나 재밌었는지 아직도 그때가 기억이 난다”며 “종철이 형이 동생한테 공부 열심히 하라고 충고하면서 웃고 떠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어 “즐겁게 야식을 먹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종철이 형이 한참을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며 “그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씨는 다음날 TV 뉴스를 보고 박 열사가 경찰 고문으로 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며 박 열사의 죽음을 단순 쇼크사로 위장하려 했다.
그는 “내가 아는 종철이 형은 경찰의 고문에 놀라서 죽을 정도로 심약한 사람이 아니었다”며 “원리원칙을 지키면서도 신념을 지킬 때는 언제나 꼿꼿한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씨는 박 열사를 ‘평소 엄격했지만 때로는 누구보다 재미있었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이씨는 “종철이 형은 심각하고 무거운 이미지의 운동권 학생들과 달리 사람의 경계심을 풀어버릴 정도로 순수하고 선했다”며 “그런 모습에 종철이 형을 따라 입학하자마자 써클에도 가입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종철이 형이 같이 사진 찍었다가 경찰에게 걸리면 안 된다고 사진도 못 찍게 했다”면서 “같이 찍은 사진이 없어 아쉽고, 보고 싶다”고 했다.
박 열사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대학 동기 이윤정(53·여)씨 역시 박 열사를 ‘노래 부르며 기타 치던 유쾌한 친구’로 기억했다.
윤정씨는 박 열사가 숨지기 전날인 1987년 1월 13일 서울대 언어학과 사무실에서 박 열사를 마지막으로 만났다고 한다.
그는 “고향에서 올라와 과사무실에 갔는데 종철이가 왔다”며 “‘어디 가느냐’고 하니까 ‘일본어 공부하러 간다’고 웃으면서 말했었다”고 전했다.
그는 “일본어 수업 늦었다고 서둘러 나가던 그 모습이 종철이의 마지막이었다”며 “다음날 동기로부터 전화를 받고 뉴스를 본 뒤에야 종철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윤정씨는 “종철이는 운동권, 비운동권 할 것 없이 모든 친구와 잘 지냈다”며 “1학년 때 대성리로 MT를 갔을 때 기타 치면서 노래도 불러주던 멋진 친구였다”고 회고했다.
윤정씨는 31년이 지나 영화 ‘1987’을 보고 박 열사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고문이라는 공포 속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행동했던 종철이를 생각하면 죄책감이 있다”며 “‘1987’을 보고 눈물이 계속 흘렀던 것도 종철이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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