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를 열다] 1971년 제7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수정 2013-04-01 00:00
입력 2013-04-01 00:00

그런데 예비회담은 ‘친우’와 ‘자유 왕래’라는 난제에 부딪혔다. 북적은 이산가족보다 친우들을 더 먼저 찾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자유 왕래까지 요구했다. 여기에는 공작원을 남파하는 통로로 이용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 때문에 회담은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쌍방은 별도의 정치적 대화 통로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북측은 처음부터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적십자회담에 나왔던 것이며 남측은 북측의 정치적 요구를 떼어내기 위해 대화 통로를 따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남측에서는 이후락 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하고 북측에서는 박성철 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했다. 또한 7·4 남북공동성명도 발표되었다. 남북관계가 급진전하자 적십자 예비회담도 속도를 내어 마침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개최하는 본회담이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2013-04-0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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